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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그 너머를 꿈꾸는 여행_김연수의 <여행할 권리>

아나리가 협박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글을 쓰지 않으면 4 lazy cats라는 간판을 3 lazy cats로 바꾸겠다나. 글을 쓰지 않는 것은 보리나 꽈리도 마찬가지인데 불공평하다고 소리 높여 외쳐봤지만, 걔들은 영감을 준단다. 나도… 쫌 주지 않냐?
아무튼, 다른 데서 청탁받아 쓴 글이었는데, 3 lazy cats가 되는 사태를 방지하고자 '재활용'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여행’이라는 단어는 나를 설레게 한다. 하루하루 일상을 보내다가도, 어느 날 하늘에 조그맣게 떠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면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것을 느낀다. 저 안에, 내가 있어야 하는 건데.
김연수의 산문집 『여행할 권리』를 집어든 건, 하늘이나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푸른색 표지도 한 역할을 했겠지만 그보다는 매혹적인 제목 때문이었다. 여행이 ‘권리’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이라고 말해주다니. 그것으로 기꺼이 책값을 지불했다. 그런데 그가 들려주는 여행이야기는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물론 김연수는 이 책에서 자동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러시아 우스리스끄를, 일본 나고야하고도 타지미하고도 카사하라라는 작은 마을을, 독일 밤베르크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를, 중국 지린셩의 룽징을, 그 외에도 여러 곳을 여행한다. 그런데 대개의 여행 에세이가 그렇듯이 여행지의 풍경과 역사를 얘기하기보다는 그곳을 지나치며 만난 사람들과, 정체성이 고정되지 않은 여행자로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그가 하는 일은 경계선 ‘안쪽’과 ‘바깥’에 관해, 문학에 관해, 나라는 정체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행할 권리』는 그저 차나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내 몸을 여기서 저기로 옮기는 그런 여행이 아니라, 경계를 넘는 여행, 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 그래서 결국은 이 안이 아닌 ‘바깥’으로 나아가기 위해 경계선을 “온몸으로 조금씩 밀어대”며 나아가기 위한 그런 여행을 할 ‘책임’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김연수가 말하는 여행은 작가라면 마땅히 해야 할 그런 종류의 여행이다. 바로 문학의 존재 이유, 작가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 즉 “비유적으로 말하면 지리적 경계에 얽매이지 않는 문학. 본질적으로 말하면, 그 어떤 경계에도 갇히지 않는 문학”을 위한 여행이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꼭 작가여야만, 혹은 문학을 하기 위해서만 이런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저 여기에서 저기로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문을 하고 의심을 하고 저 너머를 꿈꾸기 위해서라고, 김연수는 말하고 있다. 실은 굳이 자동차에 타고 기차에 오르고 비행기에 몸을 싣지 않더라도 가능한 여행. 진정으로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물리적인 몸의 이동으로써 이뤄지는 것은 아니므로. 어쩌면 이런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경계를 넘고자 하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만치 않은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산문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 재미있다. 그의 ‘총밍(聰明)’한 재치에 낄낄대고 하하거리고 웃다가 진중한 주제의식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허허실실 웃으며 시작한 이야기는 조금씩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으로 다가간다. 무겁다면 무겁다 할 이런 이야기를 잔잔하고 단단하며 유머러스한 산문 속에 녹여낸 것은 작가로서 김연수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모든 폐해는 다 보여준다.

91년 강경대–여담이지만, 나는 왜 아직 그를 '열사'로 불러야 하는가 납득할 수 없다–의 죽음으로 인해 대규모 시위가 촉발되었다. 당시 대학 신입생치고, 적어도 내 주변은 그랬다, 데모 한번 안 나가본 사람이 없을 정도. 87년 백기완 선생의 대학로 유세에 100만이 모였다지만, 이건 솔직히 환상적 리얼리즘이 자아낸 구라일 가능성이 많고. 어쨌든, 내가 본 인파로는 당시 거리에 모인 인파가 최고였다 (최근 6월 10일에 이를 능가하는 인파를 봤다!). 대학 신입생이 '혁명'까지는 아니고 의기 충천해서 뭔가 바꿀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게다가, 때는 학살자 노태우 정권의 말기 아니었나! 그런데, 당시 시위가 계속되면서 나왔던 엉뚱한 논쟁이 이른바 '밥풀떼기' 논쟁이었다. 시위에 상시적으로 가담하는 세력이 건전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밥풀떼기는 빨갱이들이 아니라–뭐 어차피 빨갱이들은 당연히 시위에 참가하니까 굳이 깔 필요도 없겠지만–노숙자, 일용직 노동자 등의 사회 불만 세력이었다. 즉, 대학생의 죽음으로 촉발된 시위가 시간이 가면서 변질되고 있는 증거로 이들을 들이댄 것이다. 이번 광우병 시위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전개되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조.중.동이 비슷한 톤의 기사를 써내더라. 당시에도 그랬지만, 사태의 본질은 그들이 시위에 가담했느냐 아니냐가 아닌데, 저들은 이런 계층적인 구조를 도덕성의 잣대와 바꿔치기 하기를 즐긴다. 당시 그들은 강기훈 씨의 김기설 씨 유서대필 사건을 비롯해 일련의 도덕성 허물기에 매진하면서 국면을 돌파했다. 아마도 저들이 그간 보여주었던 조잡함을 보건대, 간첩단 사건 하나 터질지도 모를 일이다. 근 10년 만에 '공안 정국'이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자신들이 쿠데타로 집권했느냐며 강변한다. 이건 문민 정부 때도 봤고 바로 앞의 노무현 대통령 때도 봤다. 같은 논리라면 왜 노무현 대통령의 앞 길을 그리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나? 탄핵까지도 서슴치 않았나? 노무현 대통령은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이었단 말인가? (뭐 하긴 일부는 포퓰리즘의 '쿠데타'였다고 말할 지도 모를 일이지.)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이라면 사람들을 시위하게 냅두겠는가? 이미 어떻게든 쓸어버렸겠지.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이 아니니까 참아야 하는 거고 오래 걸려도 설득해야 하는 거다. 훈련 안 된 전경들이 휘두르는 날 것의 공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은 무시하면서 공권력과 엄정한 법만을 세워야 한다는 논리도 웃기지만, "우리가 쿠데타 집권 세력이냐"는 징징거림은 더욱 가소롭다.

정말로! 맑스의 (어찌보면 [공산당 선언]이나 [자본]을 능가하는 걸작인)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에 나오는 그 유명한 구절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이 정부가 지금 하는 꼴이 딱 그렇다. 앞서에서는 비극이었지만, 지금은 희극이라는 점을 모르는 것이 더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도시의 신선(神仙)

마누라님이 하사하신 성석제의 [농담하는 카메라]를 재미있게 읽었다. 처음에는 책의 '포장'–말 그대로 외관이 아니라 상품으로서의 전략–에 둘이 툴툴 거렸다. 책에 실린 사진들이 상당히 썰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소설을 조금 멀리하는 동안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꾼'인지를 잊고 있었다. 이문열이 날뛰는 시대, 웬만한 일에는 너털웃음을 지을 것만 같은 그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하는 대목 말이다. 일종의 성석제 식 박물지라 할만한 이 책을 읽으며 그는 "도시의 신선"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그냥 한 대목 통 채로 옮겨본다. 실용의 미명 하에 정말로 쓸데 없는 짓거리를 하는 정부여, 사람들에게 말하고 떠들 자유를 달라!

몇 년 전 나를 포함한 사십대 남자 넷이 부산에서 서울로 승용차를 타고 오던 중에 일어난 일이다. 누군가 동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본 포식자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이어서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자신이 보았거나 알고 있는 포식자에 관해 말하게 되었다. 호랑이, 사자, 표범, 자칼, 치타, 퓨마와 그들의 특성, 관련된 일화가 열거되는 식으로 진행되던 이야기는 시간이 가면서 뒤섞이고 전문성을 띠어갔다. 가량, 치타와 퓨마와 표범은 호랑이, 레오파드와 어떻게 다르고 같은가, 늑대, 승냥이, 코요테, 개, 너구리의 관계는 어떤가, 그쯤 되어서는 아는 사람은 이야기를 하고 모르는 사람은 듣기만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강연을 계속하던 한 사람이 남아메리카 밀림의 어떤 맹수 이야기를 하면서 이름을 깜빡 잊어먹었다고 고백했다. 이상하게 다른 이름은 몰라도 그 이름은 자주 잊어먹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오랜 시간 늘어놓는 지식에 압도되어 사고력이 저하된 탓인지, 나머지 세 사람도 그 맹수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차 안에 있는 네 사람의 입에서 번갈아가며, "아주 쉬운 건데, 들으면 금방 아는 건데, 상표 이름으로도 본 것 같은데……"하는 이야기가 계속 나왔지만 그 맹수의 이름 첫번째 글자도 떠올리지 못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관심분야도 다른 네 사람이 공통적으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있다는 것 자체를 신기해하며 어느 한 사람이 휴대전화의 숫자판을 눌렀다. 전화를 받은 쪽에서 질문을 받은 즉시 재규어, 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차 안에서는 아, 하는 탄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왜 불혹을 넘긴 사내들이 일상생활이나 국민소득이 보탬이 안 되는 이런 이야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하는 문제는 일단 덮어두자. 이런 지식이 전파로든 말로든 인터넷으로든 오고 가고 또 오가는 가운데 우리의 존재는 활기를 얻는다. 어떤 존재든 가만히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보다는 쓸데없이 보이더라도 움직이는 편이 건강성을 높인다는 것을 우리는 운동을 통해서 알고 있다. 살아 움직이는 가운데 생겨나는 힘, 그것을 활력(活力)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사회 전체로 보면 무엇인가를 낳는, '산업'이 될 수도 있다.
불혹은 물론 희수를 훨씬 넘기며 살았던 철학자 플라톤은,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서로 뒤섞일 때 모든 사람들의 통찰력이 더욱 풍부해질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여기서의 다른 분야는 역사학, 수학, 철학처럼 플라톤이 살았던 당시에 있었던 제 분야이고 오늘날의 정보통신산업이나 승용차, 고속도로가 없었지만 그 원리는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알고 있는 지식을 말해야 직성이 풀리고 어떤 사람은 모르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즐거움을 느낀다. 이야기를 하고 듣고 대화를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눈에 보이는 보상이나 대가가 없지만 본성에 충실함으로 해서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고속으로 달리는 승용차처럼 닫혀 있는 하나의 계에서 바깥의 유전자를 받아들여 내부의 유전자와 뒤섞을 때 닫힌 계 전체의 지속가능성이 뚜렷이 높아진다는 것을 20세기의 인류학에서는 이미 확인한 바 있다.
결론은 '그날 그 승용차 안에 있던 전 구성원들이 포식자에 관해 알게 된 지식의 합계는 각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의 산술적 합계 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John H. Miller & Scott Page, Complex Adaptive Systems

사놓은지는 오래, 그러나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뒤늦게 잡자마자 일독해버렸다. 이른바 복잡계 경제학에 대한 인상은 개인적으로 그리 좋은 편은 되지 못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늦게 날기 마련이라지만, 이 의구심은 순전히 개인적인 고집과 편견 때문이었다. 복잡계라는게 결국은 복잡하다는 것 이상 이야기하는 건 없지 않을까? 당시만 해도 이념적으로 빡빡했던 시기라서 복잡계의 문제의식이 '음풍농월'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고 치부하고 말았다. 좌우간, 인생이 돌고 돌듯이 나도 복잡계에 어느 정도 관심을 기울일 계기가 생겼고, 밀러와 스캇이 이 책을 만난 것은 정말로 행운이라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책의 모두에 두 저자는 자신들이 보는 대상이 단순한 복잡계가 아니라 복잡 '적응'계(이하 Complex Adaptive System: CAS라고 쓰겠다)라는 점을 분명하고 있다. 카오스 이론으로 잠깐 주목받았던 복잡계가 한국에서는 완전히 물이 빠진 듯 보였겠으나 산타페 연구소라는 학제적인 '진지'를 거쳐 사회과학에 적합한 형태로도 훌륭하게 배양되고 있었다. 이 책은 산타페 연구소를 거친 두 저자는 사회과학 분야에서의 CAS의 쓰임새와 이론적인 정당성, 그리고 주요한 연구를 솜씨있게 소개하고 있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부분은 CAS의 문제의식과 아울러 기존의 사회과학, 특히 엄밀한 수학적인 방법론을 선호하는 경제학적인 방법과의 차이 그리고 보완에 관해 쉽게 논하고 있다. 특히, 앞부분에 적절한 비유와 인용을 들어가며 방법론을 서술하는 부분이 이채롭다. 벌집의 사례를 들어 온도의 유지와 외부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적응된 자연계의 사례는 간명하면서도 적절하다. 한편, 뒷 부분에 이른바 compuatational 혹은 generative의 이름을 달고 나오는 방법론들에 대한 옹호는 기존 경제학의 방법론과 대비하고 있어 (우환을 앞세우는) 식자들이 알아먹기 좋게 서술되어 있다. 두 방법론이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라고 주장하는 대목은 양쪽이 모두 깊게 새겨들을 일이렸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백미는 기존 연구 성과들을 압축적으로 소개하는 뒷 부분이라고 본다. 때로는 너무 압축되어 있어 알아먹기도 힘들지만, 복잡한 모형은 꽤나 먹기 좋게 요리해두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역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은 것은 T. Schelling의 Segregation 모형에 대한 여러 차원의 입체적인 분석이다. 체스 판에서 말들로 만들었다는 셸링의 모형은 서술적인 차원에 머물렀던 이른바 Tipping Point에 관한 이론적인 논의에도 불을 지핀 셈이다. 집단적인 구획화가 일어나는 데 처음에 어느 정도의 이동이나 필요할 것인지에 대한 그의 관찰은 이론적인 것 만큼이나 generative한 측면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양상을 결정하는 것이 agent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되는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상황에서 티핑의 효과가 강화되는지에 대한 다양한 모형에 대한 해설을 살피며 그간 셸링의 원래 모형에서 궁금했던 점들이 상당히 해소되었다. 한편, 산불 모형으로 명명된 간단한 모형이 은행의 파산자 관리에서 응용될 수 있다는 대목에서는 상상력을 발휘한 모델과 그 응용의 힘에 대해서 새삼 다시 느끼게 되었다. 어쩌면, 이론에서도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이 핵심인지도 모를 일이다.

부분적으로 다소 까다로운 대목은 있으되, 그간 나온 어떤 학술/교양서보다도 복잡적응계를 잘 다루고 있는 역작이다.

P.S. 보니 써 놓은지도 오래 되었더라 ㅋㅋㅋ 워드프레스 매니저 콘솔에 있길래 약간 손 봐서 올렸다.

월경과 경기

가끔 경제학의 데이터들은 의외의 장소에서 확인되곤 한다. Economist의 주간 챠트를 보면 가끔 무릎을 칠 때가 있다. Causality로는 "호경기 -> 잦고/많은 월경 시도 -> 높은 체포자 수" 렸다.